하스몬 왕조 개요
하스몬 왕국(히브리어: חַשְׁמוֹנָאִים, 하스모나임) 또는 하스모니안 왕국은 제2성전기중 헬레니즘 시대에 유대와 주변 지역을 통치한 왕국입니다. 이 왕조는 BC 140~37년까지 존속하였습니다. 하스몬 왕조는 BC 140~116년까지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 아래서 반자치적으로 유대를 다스렸으며, BC 110년부터는 제국이 붕괴함에 따라 자치권을 강화하고 페레아, 사마리아, 이두매, 갈릴래아, 이두레아 등 인접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왕들은 헬라어 칭호인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를 사용했고, 왕국은 수십 년간 지역 강국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BC 63년 하스모니안 내전에 로마 공화국이 개입하면서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였고,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가 결국 기원전 37년, 헤로데(헤롯) 1세가 마지막 꼭두각시 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제사장 맛다디아 가문과 마카비 혁명
예루살렘의 토박이인 ‘맛다디아’는 마카비 혁명 시대의 제사장이었으며, 제사장 24 반열의 첫 번째 반열인 여호야립(요아립) 가문의 하스몬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BC 167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 때에 예루살렘에서 39km 떨어진 ‘모데인’에서 자기 아들 다섯 명(요한, 시몬, 유다 마카비, 엘르아살, 요나단)과 함께 이방 제단을 부수고 반란을 일으켜 셀레우코스에 대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카비 혁명인데 맛다디아는 셀레우코스와의 전쟁을 위해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 전투를 하였으며, 이 때 많은 하시딤(경건한 자들)이 맛다디아와 합류합니다. 그러나 그는 혁명 초기인 BC 165년에 사망하고 맙니다.
1. 모데인 투쟁
‘모데인’에서 벌어진 일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그 마을에 안티오커스 4세(에피파네스)의 우상숭배 명령을 전달하러 왕의 관리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하스몬 가문의 성격이 급하고 뒤끝이 없는 제사장 맛다디아는 왕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이 앞으로 나와서 제우스 신에게 절하고 돼지를 제물로 바치려고 합니다. 제사장 맛다디아는 이를 보고 분노해서 그 사람을 죽이고, 왕이 보낸 관리들까지 다 죽이고 도망칩니다. 그 일이 작은 불씨가 되어 사람들이 맛다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힘을 합쳤으며, 경건한 하시딤들도 그들에게 동조합니다. BC 165년에 맛다디아가 죽자 그의 첫째 아들인 유다가 저항운동을 지휘하게 됩니다. 그는 매우 유능하고 과감했으며 저항운동을 전면적인 독립전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는 실제로 게릴라 전법으로 여러 가지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끕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유다의 별명을 ‘마카비(망치)’로 지어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전쟁을 ‘마카비 혁명’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2. 마카비 혁명 성공과 수전절
셀레우코스(시리아) 반란 초기에 그들을 과소 평가하여 하급 장군들을 파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격전에 능한 마카비의 군인들에게 계속 패하자 안티오코스 4세는 그제야 이 반란의 심각성을 인식하지만 당시에 그는 파르티아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에 충분한 군대를 유대로 보낼 수 없게 됩니다. 후에 상당 수의 군대를 유대에 파견하지만, 엠마오에서 유대의 마카비에게 대패하게 되고 마카비는 그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진격합니다. 이로 인해 혁명 3년 만인 BC 164년 기슬월(12월)에 시리아로부터 종교적인 독립을 쟁취합니다. 성전에 가득한 돼지 피를 닦고 성전을 청결케 하고 성전을 봉헌합니다. 이것이 히브리어로 '하누카, חֲנֻכָּה)(수전절)’라고 하는데, 신약성경 요한복음 10:22절에만 나오는 새로운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절기는 거의 구약성경에 근거를 두지만, ‘수전절’은 중간사에 근거를 둡니다.

3. 이스라엘의 왕권과 제사장 권한 통합과 정치적 독립
경건한 하시딤은 종교 자유의 획득에 만족하고 전쟁을 중단하자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승리의 맛을 본 유다 마카비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정치적인 자유(독립)를 얻기 위해서 전쟁을 계속합니다. 결국,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을 다시 포위했으며 이때(BC 161년) 시리아 군대에 의해 전사합니다. 유다 마카비가 전사한 후에 그의 동생인 요나단이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고 시리아군은 여러 번 요나단의 저항 세력과 싸웠지만, 그들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합니다. 이때 시리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는데, BC 153년에 알렉산더 발라스가 스스로 자신을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시리아 왕이었던 데메트리우스 1세를 공격합니다. 이 두 사람은 권력 투쟁 속에서 모두 유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때 요나단은 발라스를 지지합니다.
발라스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요나단을 대제사장 겸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는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왕권과 제사장 권한이 한 사람에게 통합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옛날의 신정정치가 부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요나단은 시리아의 장군에 의해 살해되고, 그의 형제 시몬 타시(BC 142~134)가 그를 이어 대제사장이 됩니다. 그러나 시리아는 다시 내분 상태에 빠지게 되자 이번에는 시몬이 데메트리우스를 지지합니다. 이에 대해 데메트리우스는 유대인들에게서 받던 세금을 면제해 줍니다. BC 142년에 이르러서 막내 아들 시몬이 시리아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을 쟁취합니다. 바벨론 제국에게 BC 586년에 유다(예루살렘)라는 나라를 뺏앗겼다 다시 찾은거니까 BC 444년 만에 독립한 것입니다.
4. 하스몬 왕조 합법화 및 왕과 대제사장 혈통 붕괴
유다 백성들은 444년 만에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이룬 ‘시몬 타시’가 ‘메시아’처럼 보였습니다. 랍비들과 지도자들은 시몬에게 “당신은 왕과 대제사장의 칭호를 동시에 취하시옵소서.”라고 요청하고,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시몬을 영구적인 왕과 대제사장으로 결정합니다.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하스몬 왕조가 합법화되었고 이때부터 유다는 왕의 혈통과 대제사장의 혈통의 정통성이 다 무너집니다. 왕 겸 대제사장이었던 시몬도 BC 135년에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그후, 그의 아들인 요한이 요한 힐카누스 1세(BC 134~104)라는 칭호로 시몬의 뒤를 이어 왕 겸 대제사장의 자리에 오릅니다. 몇 개월 후 프톨레미(애굽)의 요청에 따라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7세는 그의 지배권을 재확인하려고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힐카누스 1세는 결국 항복합니다. 이때, 안티오코스는 유대의 자치권을 보장하지만, 예루살렘 요새를 헐어 버리고 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게 합니다.
5. 하시딤의 분열과 3개 종파 출현
마카비 일가는 마카비 시대 초기에 경건한 하시딤과 동맹을 맺었지만, 요나단의 통치 때에 하시딤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그리고 에세네파로 분리됩니다. 처음에 힐카누스 1세는 바리새파와 좋은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이 그에게 대제사장직을 내놓으라고 요청하게 되자 관계가 나빠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힐카누스 1세가 기분이 좋아서 잔치를 벌이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을 때 발생합니다. 이 잔치에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던 ‘하시딤’도 초청되었는데 그는 하시딤이 혁명을 지지해 준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서 술이 얼근하게 취한 상태에서 하시딤에게 무슨 요구 사항이든지 말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시딤의 대표 ‘엘리아살’이 일어나서 “당신은 위대하지만, 왕과 대제사장직을 겸직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자 힐카누스의 얼굴 빛이 변합니다. 엘리아살이 떠난 후에, 사두개파 요나단이 그에게 엘리아살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시딤 전체가 그를 반대한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에 힐카누스 1세는바리새파와 결별하고 사두개파와 손을 잡습니다. 당시 사두개파는 백성들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로 인해 정치에 첫발을 디디게 됩니다.
고대 유대 종교와 유파
고대 유대교의 주요 4대 종파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젤레파‘의 기원과 특징을 다음과 같다.
‘에세네파(Essenes)’는 BC 3~2세기에 성전에서 축출된 진보적 레위인들의 전통을 보존한 유파이다. 쿰란 사해 문서 발견 이전, 간접적인 자료만 있던 시기에 단순한 분파주의로 알려졌으나, 사해 문서 발견 이후 에세네파인 쿰란 공동체가 대부분 사회활동을 하며 수도 생활을 병행했고, 일부는 완전히 분리된 장소에서 수도(修道)하는 기간을 보낸 사실을 발견했다.
유대종교 유파 중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유파로 예루살렘 성전 반대주의와 신비철학적 성격이 있다고 알려졌다. 이들 역시 헬라주의가 영향을 끼친 BC 3~2세기경부터 형성된 이들로 진보적 레위인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 역시 BC 2세기에 정치적으로 성전을 장악한 사두개파로 인해 제사장의 지위를 상실한 진보적 레위인의 후손으로 유대종교의 진보적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토라 해석과 활동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사두개파가 성전을 장악하기 시작한 기원전 3세기 이후부터 예루살렘 성전은 자정능력을 상실한 곳으로 규정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유대 종교에서 벗어난 진보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정치적으로 제사장직을 찬탈한 사두개파가 관리하던 예루살렘 성전과 함께, 사두개파와 친밀하고 보수적 율법을 주장하는 바리새파와도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에세네파는 광야로 이동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을 시작했고, 이들은 광야의 에세네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되어 살아간 일부와 일반 직업을 갖고 사회 활동을 하는 이들로 자연스레 구성되어 그 영향을 지속하였다. 이들은 유대 종교의 특징이었던 성전 중심주의를 벗어나 자신들의 제사 장소에 분리되어 활동하였고, 그곳을 부패한 성전과 달리 진정한 성소로 여겼다. 사회활동을 하는 에세네파 구성원은 유대절기에 성전에 가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속한 지역 성소에 모였으며, 일정 기간 성소에서 수도 활동을 하기도 했다. 정결한 삶을 위해서 자신들만의 성소에서 정결예식과 제사의식을 거행하였고, 다양한 저술 활동과 교육을 실시하였다.
관련 문헌에 따르면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정경 해석을 남겼다. 이들은 유대종교에서 보수적 성격인 사두개와 바리새파의 견제를 받았다. 그리고 AD 70년 로마제국의 이스라엘 전쟁에서 반로마제국적 성향으로 직접적인 공격을 받아 관련 성소와 기록 자료들이 소실되었고, 살아남은 에세네파는 대부분 기독교와 바리새파에 흡수되었다. 이후 에세네파는 간접적인 자료와 약간의 문헌만이 전해져 왔었으나 에세네파의 직접적인 문헌이 1947년부터 쿰란 부근의 동굴들에서 대규모의 사해 문서로 발견되어 에세네파의 자세한 상황과 사상 등이 알려졌다. 특히 에세네파의 사상은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남은 바리새파가 유대 종교의 특징인 성전 중심주의를 벗어나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는지에 대해 연구 중이다. 또한, 에세네파의 사상과 활동이 초기 기독교와 후기 유대 종교인 현재의 바리새파 유대교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젤롯파(Zealot)’는 에세네파 내에서 더욱 진보적인 성향의 부류가 흔히 열심당으로 알려진 젤롯파로 발전하였고, 이들은 AD 1세기 로마제국의 이스라엘 지역 지배에 대해 반발한 무장 저항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스라엘 무장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이로 인해서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시기에 젤롯파는 로마제국의 직접적 공격을 받았다. 에세네파 역시 젤롯파와 함께 로마제국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살아남은 이들 중 많은 수가 기독교나 바리새파에도 흡수되어 AD 1세기에 사라지게 되었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8C%80%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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